지난 2016년 1월 대종회 총회를 마친 후 족조 금식이 2015년도에도 말씀드렸지만 돈암공파보가 발간된지 30년이니 현 회장인 윤환의 임기 내에 추진하여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면서 발의한 후 동년 10월 3일 관악산 중시조 세향제 후 서울시 장안동 모 음식점에서 족조 요식께서 추진위원장으로 족형 윤환으로 하고 총무와 각 문중의 위원은 위원장께 위임하도록 하여 총무는 나에게 맡아 달라고 하니 딱히 거절할 수 없어 맡게 되었다.
다만 예전과 같이 자자일촌하고 함께 살아가는 농경사회가 아니어서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수단(명단)을 받을 수 없으니 인터넷(internet)을 사용하여 모바일(mobile)식으로 등재하도록 인터넷 전문회사인 주식회사 척척미디어를 소개받아서 사전에 족보 발의자인 남면의 문중의 족조 금식 강진 문중의 족조 우식 돈암공파 회장 윤환과 족형 명환이 나와 함께 출판사를 방문하여 설명을 들은 후 동년 12월 초 무렵 종제 해균에게 고창군청 근처 모 식당에서 설명회를 할 수 있는 장소를 부탁하여 남 북면의 일가에게 출판사 전무이사 이형범의 안내로 남면 문중의 회장 족조 윤식과 북면에서 고인이 되신 족형 일환 등 남 북면 종원 수십 명이 함께 설명을 들었다. 그러나 족보 발간을 결정한 후 예산편성도 하지 않고 진행하려고 하니 선 듯 진행할 수 없었다.
예산편성은 임원회를 통해서 용장문중(목우리.발룡.북창공.양사동.운봉.곡성)이 2,500만원 남면문중 2,000만원 강진문중 500만원 씩 갹출하는 것으로 결정하니 소요경비는 오천만 원이 되었다. 지금부터 사무실을 구한 후 사무용품 등을 준비하려면 초기 자금이 만만치 않으니 다른 방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어서 출판사에 고민을 말했더니 출판사 내에 회의실이 있으니 모든 장비 등 필요한 대로 활용하도록 배려하니 회장 윤환과 족조 금식 족조 우식 족형 명환이 함께 결정했다.
사실 이러한 일은 회장단에서 미리 준비한 후에 일을 시키는 것이어야 했는데 옛날 방식에 젖어계시는 분들이어서 그 한계를 나 혼자 감당해야만 했다. 이어서 문중별로 수단(명단)을 등재하도록 인터넷 회원가입을 권유하고 인터넷을 사용하지 못하는 분들에게 가족관계증명서를 받아 등재하면서 남원 문중과 곡성 문중은 왕래가 끊긴 세월이 수년이 되어 수단(명단)을 받을 수 없어 직접 방문계획을 세워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묘소 주소를 찾아 먼저 남원 문중을 찾아 명단을 받아 왔으며 그해 여름 곡성에는 종제 윤곤과 함께 곡성군청으로 찾아가서 강씨가 살고 있는 마을을 수소문했으나 지금은 아무도 살고 있지 않고 묘소만 곡성군 구원면 구원리 산 일주봉에 모셔져 있음만 확인하고 곡성군청 학예사 이은정 씨에게 의뢰해서 알려 달라고 한 후 상경하였다.
예전의 파보를 검토해 보니 자손록의 생년월일이 간지(干支)로만 기재 돼 있어서 서력기원을 병기하고 재각의 재실과 선대묘소 사진은 흑백(黑白)에서 천연색사진으로 하였고 특히 파조이신 돈암공 묘소가 실전(失傳)되어 기록으로만 홍농면 이서도로 표기되어 있어 족조 중진께서 알려준 장소를 찾았으나 찾기 어려워 홍농면 사무소 직원의 안내로 묘소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이서도를 전면에 배치하고 뒷배경을 사진으로 추정하여 종제 해균과 고창군청의 드론(drone)을 빌려서 남 북면의 선조묘소를 일괄적으로 촬영하였으나 높은 곳에 모셔져 계시는 송림산의 묘소는 공중촬영이라 봉분만 보이는 묘소로 재촬영을 족조 경렬께 부탁하였다. 강진문중의 묘소는 말벌집이 있어서 벌초를 못 하니 거친 풀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특히 이번 족보 제작에 갈마곡 문중 강진 문중 북창공 문중 양사동 문중이 참여하지 않아 제작비 문제가 발생하여 운영에 상당한 차질을 빚게 되었다.
족보 제작을 시작하기 전부터 각 문중의 위토 정리 공고가 되어 우리 문중도 돌아가신 분의 명의로 되어 있는 전답을 족형 인곤 형제 이름으로 변경 신청했는데 상속자 중 한 사람인 족제 창균이 이의신청을 하니 진행이 중단되었다고 족형 인곤이 전화 통보를 내게 하니 창균에게 전화를 하여 이의신청을 철회해 주기 바란다고 청하니 창균이 그럴 수 없다 하여 군청으로 전화를 했더니 다른 방법이 없다면서 앞으로 1년을 기다려야 다시 진행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인곤 형제의 명의로 이전하려면 상속자가 아니어서 명의 이전하는데 발생하는 세금이 약 이천만 원 이상 삼천만 원 정도 소요된다는 군청 직원의 설명을 듣고 방법을 물으니 상속자 중 1995년 5월 이전에 돌아가신 후손이어야 상속세가 면제된다는 것이어서 창균과 상의를 하니 나의 장형이신 택균 명의로 이전하면 상속세가 면제되니 일괄적으로 처리하도록 종제 해균에게 일임하여 2020년 초에 시작하여 2023년 4월에 마무리하니 용장문중의 약 4천 평의 논은 족형 인환 후손의 이의신청으로 직불금을 받을 수 없게 되었으며 남면 문중의 논 약 삼천여 평도 관리자 명의로 되어 있는 관계로 당사자 부재로 직불금을 받지 못하게 되어 양쪽 문중의 수입이 반감되었다.
전한국학중앙연구원교수인 허흥식 박사가 태평산인께서 저술하신 여러 권의 책 중에서 와유록에 대해서 연구발표를 할 예정이니 입력하여 달라고 하니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하였다. 허흥식교수는 지난 1986년에 태평산인의 생애와 저술과 가계(家系)를 한국 사학계에 이미 발표한 바 있기에 나는 개인적으로 지원하길 결심하고 앞으로 연구발표 하는데 필요한 요구가 있으면 언제나 응하기로 하였으며 2018년부터 2023년까지 필요한 자료를 부탁하면 제작하여 드리고 태평산인 묘소(죽청)와 선조묘소(용장)는 이미 다녀왔으며 무장향교와 무장현청 송림산 묘소와 선운사 문수사 동호 등을 족숙 형국과 함께 2022년 4월에 2일간 두루 방문하였고 동년 10월에 ‘강후진 새로운 학문의 개척자’라는 제목으로 안동 국학원에서 발표할 자료를 제공해 드렸다. 태평산인께서 저술한 송사지에 자연당공 이름 서벽의 시문과 기재공 이름 적후의 선운산가 고송당공 이름 후석의 호남가는 선조의 수준 높은 시문의 발췌로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되었음이다.
족보 제작과 함께 위와 같이 여러 일을 함께하니 정신은 힘이 들지 않았으나 주위에 족보 제작이 늦어지는 것에 불만을 토하는 종원들은 나의 개인적인 일상을 알지 못하고 비난하는 것에 심신(心身)이 힘들었고 어이없음에 말을 잇지 못하는 괴로움은 나 혼자 삭일뿐이었다. 위토 정리와 태평산인 연구발표 자료 지원사업과 자손록 입력과 문헌록 번역 그리고 병원 입 퇴원을 일상으로 해야 하는 현실 속에 족형 윤환의 처음 약속을 저버린 행위는 나를 참으로 비참하게 만들고 앞서 언급했던 일부 종원의 비이성적인 비난 행위는 용납이 아니 되는 일이지만 상황을 모르고 하는 것이라 스스로 위로하고 ‘덕이 있으면 외롭지 않고 좋은 이웃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지만 나에게는 덕이 부족함을 절감하면서 늦어진 만큼 얻은 것은 중화강씨문화원에 기록된 문헌에 시조 강숙(康叔)의 둘째가 동쪽으로 갔으며 이름은 중모(仲髦)라는 사실과 3천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성씨(姓氏)임이 유물로 발굴되어 증명되었다. 끝으로 족조 금식과 중진 태근 경렬 원식과 현회장 당숙 의종과 족숙 형국과 성실 족형 일수 명환 인곤 족제 남환 남균 영설 종제 윤곤 해균과 고인이 되신 족형 일환의 격려가 큰 도움이 되었음에 감사의 말씀을 드리면서 나의 능력 부족으로 모두 만족스럽게 하지 못한 점을 이해하여 주기를 부탁하면서 졸필을 마칩니다.
계묘 2023년 늦은 가을 돈암공 19세손 동균
*** 이 글은 지난해 족보를 마무리한 후에 작성한 글로 족보가 완간되면 자연스럽게 모두 이 사실을 알게 되므로 늦어진 경위는 물론 나에 대한 오해도 해소될 것이기에 참아 왔는데 지난해 돈암공파 가을 세향제 이후에 족보 발간을 빌미로 현택은 여기저기 전화를 해서 나에게 심한 모욕감을 주는 행위가 있음을 알았으며 현택은 족보발간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한 사람인데 뒤늦게 시비를 거는 일에 재미를 붙이는 인간성이 의심스럽고 이러한 일이 발생하도록 빌미를 제공한 농지 특별법에 의한 위토 정리를 하는 3년 동안 나와 종제 해균은 사비(私費)를 들여가면서 개인적인 일도 하지 못하고 일을 마무리했는데 이 모든 일에 책임이 있는 윤환 회장은 용장문중의 논을 팔아서 달라고 아침저녁으로 내게 전화를 하였고 인곤과 의곤 형제는 상속 권한도 없는 사람이 용장문중의 위토를 두 형제 이름으로 신청하여 만 1년간의 세월 동안 특별법을 진행 시키지 못하도록 지연시켰다.
만약에 창균이 이의신청을 하지 않고 진행을 했다면 양도세만 2천만원~3천만원 발생하게 되고 문토를 문중으로 귀속시키는데 또 양도세금이 발생하게 되어 2중으로 세금을 지출하는 사례가 발생했을 것이다. 이렇게 일을 저지른 사람은 묵묵부답으로 전혀 반성도 하지 않고 오히려 나와 해균이 문중 돈을 활용하는 사람으로 중상모략을 하는 사람에게 변호하기는커녕 즐기고 있는 모습이어서 이글을 게시하는 것임을 알리고 우리 사문중(私門中)의 일로 현택은 앞서 언급한 대로 생가로 족보를 이기 할 것임을 밝히며 이유 또한 같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