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말부터 파보 제작에 본의 아니게 참여한 이후 파보제작 사무실도 준비하지 않은 상태여서 처음부터 순조롭지 않은 조건 아래에서 회장이신 족형 윤환께서 문중의 크고 작은 일을 함께 맡아서 해달라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떠맡은 업보가 현재 상황에서 뒤돌아보니 참으로 겁이 없고 무모하게 그리고 숨차게 달려왔다.
이런 와중에 일부 문중 일원의 터무니없는 오해와 제멋대로 생각을 여과 없이 여기저기에 중상모략으로 나의 명예를 훼손함은 물론 우리 소문중의 성가를 무너뜨리는 언행으로 아무런 증거도 없이 내가 족보편찬을 하면서 일천만원의 돈을 받아 갔다고 하는 말에 부화뇌동하는 분들이 있음에 놀랐다.
홈페이지를 만들고 족보를 편찬하는데 일천만원이면 완성할 수 있다는 말로 마치 내가 많은 돈을 횡령한 것처럼 오해할 수 있도록 하는 말을 하고 여러 곳에 전화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있다면 나에게 직접 묻거나 출판사에 확인하면 되는 일인데 치졸하고 못나게 뒤에서 비겁한 짓을 하는 것에 화가 나고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나와 만나기 싫다면 고소를 하면 될 일이다.
이와 같은 말을 여기저기 전화로 퍼 나른 현택에게 이 글을 전하기 전에 지나간 일들에 대해서 부끄러운 우리 집안의 검은 역사를 밝히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하고자 한다.
1970년 중반에 너의 부친(양환)이 장군봉 5대조 할머니 묘소에 고조부(윤수)묘소를 문중과 상의도 없이 투장(몰래 이장)하려다 발각이 되어 문중에서 확인하니 생가의 증조부(종택) 묘소를 이장하려 했음이 드러났었다. 이 일로 너의 부친은 단지동(인환) 형님을 폭행을 했는데 이 일은 우리 소문중의 일로 다른 집안에서 간여할 일이 아니어서 나의 당숙(성환, 주풍, 주홍) 등의 중재로 너의 부친께서 인환 형님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는 것으로 갈무리하였으며 이후 너의 부친은 문중 일에 간여하지 않도록 하였다. 위 사실이 의심스럽다면 현재 살아계시는 전주(윤환) 형님께 확인하기 바란다. 나는 이 일을 용장 시제 때 당숙님들에게 들었으며 전주 형님께는 여러 번 들어서 잘 알고 있기에 이를 다시 밝히는 이유는 너의 무모하고 무지한 행동이 깃털보다 가볍고 한 마디로 천지 분간을 할 줄 모르는 망나니 같기 때문이다.
너의 부친의 그 일 후에 너의 숙부(달환)도 문중 일에 간여하지 못했으며 당면족숙(극신)께서 문중회장 때 개인적 친분으로 참여했을 뿐이다.
전주(윤환) 형님이 돈암공문중 회장으로 재임 중일 때 나는 너를 대종회에 효자효부상을 받도록 추천하려고 형님께 사인을 해 달라고 부탁하니 형님께서 선 듯 나서지 않으려 하셨지만 설득해서 받도록 했다.
신천강씨대종회 종가와 종기 심볼(symbol) 제정위원회를 운영 중일 때 네가 종가 작사 기본 틀을 만들어 왔기에 제정위원장이신 현 대종회장(복창)께서 작사자를 위원회로 하지 않고 네 이름으로 하는 것에 대하여 당시 회장이신 주희께서 너의 이름으로 하는 것으로 동의하도록 하였는데 원칙적으로 종가제정위원회 명의로 해야 마땅했고 앞으로는 종가 작사자를 대종회종가제정위원회 일동으로 할 것을 제안할 것임을 알린다.
끝으로 우리 소문중에서는 너의 경박하고 무지한 언행으로 문중의 성가가 심하게 훼손되었으므로 종손으로 인정할 수 없으니 생가로 족보를 옮기는 것을 밝힌다.
하여 너는 용장문중의 일을 공식적으로 할 자격도 없음을 밝힌다.
위와 같은 사실에 이의가 있다면 사법적인 판단을 네가 요구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하기 싫다면 지금까지 네가 함부로 언행을 했던 일에 대하여 문중은 물론 대종회에 그대로 다시 한 번 밝히고 너의 양심에 따라 깊은 사과를 하기 바란다.
이 글은 돈암공파 홈페에지에 등재할 것이다.
용장문중은 의사 이름 덕민 사재공의 아들 이름 귀생 호 영모처사의 아들 이름 지수 호 인천선생의 큰아들 이름 유태 호 화수정공 둘째 이름 우태 호 북창공 셋째아들 이름 익태 호 장강공을 총칭하여 부르는 문중의 이름이다.
화수정공 큰아들 이름 이형은 아들이 없어 둘째인 이름 후범 호 양천재 셋째 이름 후진 호 태평산인 넷째아들 후준 모두 외아들만 낳으니 양자를 보낼 수 없어 둘째가 대를 이어 왔으며 공의 아들 종효 호 월탄공께서 아들이 없어 북창공의 후손인 3종제의 아들 계현 호 소석공을 계자하여 대를 이어왔다.
공의 아들 원주 호 우재공께서 3형재를 낳으셨는데 첫째 이름 치근 호 인애당 둘째 이름 치화 호는 인재 셋째 치훈 자는 무여이다. 이름 종묵 호 노헌공께서 아들이 없어 동생 인재공의 둘째아들 익수는 봉언에게 계자 했는데 생가의 사촌 이름 조수 자 무여공이 아들이 없어 둘째아들 종록을 계자 하고 종록은 그 둘째아들 우영을 생가의 종형 노헌공께 계자하여 종손이 되었으며 생가의 조카 이름 종기 호 우은공이 아들이 없어 손자 구영을 계자하였다.
상기와 같이 용장문중을 대표하는 가계는 이상과 같으며 자자 일촌으로 화목하게 잘 지내왔으나 산업사회(1970년)이후 일부 잘못된 종손의 행동으로 우애가 깨진 것은 이들이 겸손하지 못하고 문중에 기여한 공로도 없이 군림하려는 자세가 생손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몰상식은 더 간과할 수 없다.
계자(양자)의 본래의 목적은 조상을 받드는 일 즉 성묘와 제례인데 19세기 이후 양자법도 없어졌지만 제례와 성묘도 장손이 아니어도 모든 후손이 벌초하고 제사도 지내게 되었다. 예를 들어 우리 선조이신 이형 등 몇 분은 계자(양손)도 없지만 우리가 이들 선조 묘소에 벌초하고 제사도 함께 모시고 있음이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종손의 개념을 알지도 실천할 의지도 없는 양손을 종손으로 만들어 놓은 불합리한 선조들의 무리한 족보는 이제 존속시킬 까닭이 없으며 호적법이 없는 시절의 족보는 그 자체로 충분하였지만 지금 족보의 개념은 호적에 없는 선조의 이름과 선조의 역사적인 행적을 되새기는 개념으로 가치가 충분하기에 꼭 필요한 것일 뿐이다.
하여 다시 한 번 더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문중에 공로도 없는 자손이 우애와 화목에는 방해가 되고 문토에 욕심을 내고 문중 자산에 눈이 멀어 함부로 말을 하거나 문중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위는 절대 용서해서는 아니 되는 일임을 명심하기를 바라면서 줄이고자 한다.